컨셉진 레터 ISSUE.02 안녕하세요! 편집장 김경희입니다. 두 번째 레터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 ) 지난주 첫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고 나서 저 혼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어요. 아직 컨셉진으로 찾아뵌 것은 아니지만, 간만에 여러분께 소식을 하는 거라 설레는 마음 반, 괜스레 조심스러운 마음 반이었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떠실까, 이렇게 전하는 레터가 반가우실까, 재밌게 읽으셨을까, 궁금했는데 몇몇 독자분들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답장을 보내주신 덕분에 조심스러운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에게는 ‘업무’인 레터 작성이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마음처럼 굉장히 기다려지더라고요. 오늘도 설레고 반가운 마음 가득 품고 여러분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 ) 오늘은 여러분께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를 공유드리려 해요. <컨셉진 13호>에 실렸던, 영화사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님 인터뷰입니다. 주옥같은 인생의 깨달음이 한가득 담겨있으니,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어 나가시길 바랄게요! 혈기와 용기 “어느 날 제가 만든 영화가 다 쓰레기처럼 느껴졌어요.”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에게 들은 뜻밖의 고백. 에디터 김재진 포토그래퍼 최모레 #1. 5타석 연속 홈런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사나이픽처스 대표 한재덕이라고
합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베를린>에 제작 PD로 참여했었고 사나이픽처스를
설립해 <신세계>, <남자가
사랑할 때>를 만들었어요. 얻어걸리는 1,000만 영화보다는 저만의
근사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평범한 아저씨죠. 영화계에서 PD란
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PD마다
어느 역할까지 맡느냐는
조금씩 다른데 보통
감독이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라면 그 외적인
건 전부 PD가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영화를 기획하고
감독, 배우를 캐스팅하고, 투자사를 찾고, 마케팅을 통해 극장에
개봉시키기까지 영화 전반을
함께하는 엄마 같은
존재죠. <신세계>를 찍을 때는
황정민, 최민식, 이정재
같은
주연배우들이
사나이픽처스의
창립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출연료를
낮춰
영화
제작을
도왔다고
들었어요. 많은 관계자로부터 신뢰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
거죠. 어느 책에서 '사람은 보통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다'는 글귀를
봤어요. 제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상대방은 다
알아요. 주연 배우로서 한
영화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누구한테 까인
건데 너 주는
거야’처럼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맡기는 게
속 편해요. 안되면 마는
거고 되면 좋은
거죠. 누군가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하고, 사기를 치면
그 사람들과 계속
일할 수 없어요. 사나이픽처스는 그 이름답게
굵직한
남자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
왔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회사 이름을 잘못
지어서 그런가 봐요. (웃음) 지금 하고 있는
분야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나이픽처스’스러운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욕망도
있어요. 해외 영화제에 나가보니
좋은 외국 영화가
참 많아요. 그런데 우리도
조금만 더 잘
찍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나이픽처스 로고만
봐도 '누군가가 죽겠구나, 한바탕 액션이
펼쳐지겠구나!’같은 기대를 하면서
적어도 '이 영화가 후지진
않겠구나'란 확신을 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에 제작하신
<남자가 사랑할 때>는 정통적인 멜로
영화여서
다소
의외였어요. 갑자기 멜로를 만드신
이유가
뭔가요? 제 인생의 멜로
영화라면 <파이란>을 꼽고 싶어요. 요즘 시대 친구들에게도
그런 감성을 전하고
싶었어요. 파이란 영화가 상업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제작자와
배우들, 감독들은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루저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못
살잖아요. 또, 기본적으로 모든 남자는
자기가 불효자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걸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PD의
역할
상
만들고
싶은
것과
투자사의
요구사항
때문에
생기는
충돌로
고민도
많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때는 돈을 번다는
가정하에 시작하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깐 어떻게 하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요. 계획된 예산 안에서
잘 찍게 하는
게 PD의 중요한 역할이죠. 투자사의 입김이 센
건 사실이에요. ‘슈퍼갑’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찍고 있는 하정우, 강동원 주연의 ‘군도’ 같은 경우는
총 제작비가 180억쯤 될
거예요. 이건 중소기업 몇
개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할 액수잖아요. 그런데 딱
올여름이면 결판이 나요. 엄청나게 살벌한 판이죠. 당연히 만드는 쪽과
투자하는 쪽의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감독들이
영혼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요. 감독이 계속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면
투자사는 ‘그럼 네 돈
갖고 찍어’ 이렇게 나와요. 이런 것들을 다
조율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사실 고통스럽죠. 이건 ‘슈퍼을’이 되는
수밖에 없어요. 누가 봐도
기가 막힌 시나리오와
연출력, 배우를 갖췄다면 전세가
역전되기도 하거든요. 연이어 흥행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운이죠. 제가 <남자가 사랑할 때>까지 다섯 편
연속 성공시킨 건데
이건 충무로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예요. 가끔 제가
잘해서 성공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함께해준 배우들, 감독들, 스태프들이 잘
해줘서지 제가 잘한
것 같진 않아요. 앞으로 성공 타율을
계속 높이면서 어떤
분야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고
싶어요. '칼 쓰는 영화는
신세계가 최고지'같은 레퍼런스가
되는 영화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를
계속 찾아 나섰던 과정 같아요. 그러다 영화를 만난 거죠. 제가 처음부터
계속 잘 풀렸으면 안하무인이 됐을 거예요.” #2. 뭘 해도 안 되던 때 영화계에 들어오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원래는 운동선수나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
그렇겠지만 우리 집이
그리 부유하진 않았어요. 공부도 별로 못했고
방황도 많이 했죠.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 도시락만 싸서 다니며
밥만 축내는 그런
애 중 하나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미술부에
들어갔는데 정말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제가
화가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죠. 그땐 제가 정말
잘 그리는 줄
알았어요. 그럼, 대학도
미술
쪽으로
가신
건가요?
어릴 땐 뭘
해도 되지 않았어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대학에 계속 떨어졌어요. 야간으로 전문대 디자인
과를 들어갔는데 재미도
없고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고요. 매일 영화만 보러
다녔어요. 축구도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깐 막노동도 하며 '난 뭘 해야
하나?’ 방황했죠. 그러다 군대 다녀와서
영화가 하고 싶어졌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여기도 세 번이나
떨어졌죠. 아버지의 부탁으로 경찰
시험도 봤었어요. 그것도 다
붙었다가 마지막에 떨어졌죠. '정말 난 뭘
해도 안 되나?'싶어 좌절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시나리오작가교육원에 들어간 거예요. 처음엔 각본을 써서
감독이 되려고 했죠. 그런데 아무도 안
써주더라고요. 영화사에 찾아가면 '그냥 자장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고나 하고. 영화감독에서 영화 제작
쪽으로
진로를
변경하신
이유는
뭔가요?
어느 날 아는
분이 '제작부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200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월 200만 원이면
할 만하잖아요. 그래서 한다고
했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1년에 200만 원 이래요. (웃음) ‘내가 막노동 뛰면
하루에 얼마를 버는데’하고 처음엔 안
갔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제작부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조금은 뜻하지 않게
시작한
제작부
일인데
거기서
어떻게
흥행 PD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나요?
일단 운이 좋았고요. 그리고 전 솔직히
이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어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오로지 남에게
매일 부탁만 해야
하더라고요. 전 무슨 전생에
죄지은 사람만 하는
직업인 줄 알았어요. 힘들었지만 그냥 딴생각
안 하고 하라는
대로만 했어요. '오늘 여기서
찍어야 한다'고 하면
찍게 만들고, '돈 깎아야
한다'면 그렇게 했죠. 잔머리 안 굴리고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랬더니 운
좋게 빨리 PD가 됐어요. 여기저기 스카우트도 많이
오고 억대 연봉도
받았죠.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그런데 잠깐이더라고요. 곧 '내 실력이 아니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저런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결국, 서른아홉에 병이 났어요. 병실에서 '내가 다시 영화를
하게 되면 그동안
참다가 병이 난
거니깐 앞으로는 아닌
건 아니라고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대신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했어요. 뭘 해도 안
되던
젊은
시절이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딱히 방법은 없었죠. 고통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겨내는 방법은 없어요.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처럼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를 계속
찾아 나섰던 과정
같아요. 그러다 영화를 만난
거죠. 제가 처음부터 계속
잘 풀렸으면 안하무인이
됐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대단한 감독들도 첫
작품은 그저 그랬어요. 그 과정에서 저는, 제게 가치 있는
일을 찾았고 종교는
없지만 계속 기도해서
위에 계신 분이
답을 들어 주신
것 같아요. 뭐 답을
듣지 못했어도 엄청나게
기도하고 노력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PD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영화는
뭔가요?
기억에 남는 영화요. 잘 만든 영화들은
가슴에 뭔가를 남기잖아요. 3~4년 전 프라하에
갔을 때 한
식당에 갔더니 전부
대부 시리즈로 도배되어
있었고 새벽 7시부터 대부 OST가 흘러나왔어요. 그런데 그곳
관리자가 중학생쯤 됐더라고요. 너무 인상적이어서 물어봤더니
그 꼬마가 대답하길
대부가 '자기 인생의 영화’래요. 대부 1편이 1970년 초에 나왔는데
그땐 그 꼬마의
부모가 태어났을 시기잖아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좋은 생채기를
남기는 그런 영화요. “사람들은 남들 앞에선 이런저런 실패한 이유를 이야기해요. 그런데 혼자 방구석에 앉아 거울을 보고 있으면 왜 실패했는지 자기는 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핑계를 대고 싶은 거예요. 답은 자기 안에 다 있어요.” #3. 내 안의 답 만들어 오신 영화를
보면, 주연 배우도 그렇고
스태프들도
그렇고
한
번
연을
맺으면
계속
가는
것
같아요.
전 제가 겪지
못한 사람은 잘
믿지 않는 편이에요. 반면에 한 번
믿은 사람은 계속
믿어요. 일하다 보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전 그
자리에서 판을 깨요. ‘그런 이야기 할
거면 난 당신과
일 못 한다’고 분명히 말해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믿지 않아요. 일을 따내기
위해서는 그런 자리에서
상대방 이야기에 적당히
동의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전 그렇게는
못해요. 제가 먹고살자고 절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할
순 없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누군가를
믿다
보면
상처받을
일도
많이
생기지
않나요?
엄청나게 많죠. 한번은, 제가 희생을
감수하고 양보했는데 잘
되고 나니 자기들만
잘 난 거예요.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나도 좀 이기적으로
살자’ 마음먹기로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나도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고.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요. 지나친 배려가 제
삶의 정신상태를 좀
먹는 걸 놔둘
이유가 없어요. 물론, 그렇게 마음먹는
저 자신을 보는
게 슬프죠. 화가 나요. 하지만 삶은 그런
거예요.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100%를 얻는다.' 그런 건
없어요. 동화죠. 적장의 목을 베려면
제 팔 하나는
내줘야 해요. 어떤 일을
해도 상처받지 않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많은 사람이 대표님을
성공한 PD라 이야기하는데 본인도
그렇게
느끼시나요?
사실 40대 중반에 우울증이
왔어요. 어느 날 제가
만든 영화가 다
쓰레기처럼 느껴졌어요. 민식이 형한테
전화해서 한참 하소연도
했어요.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나이를
먹으면서 서글픈 생각들이
들었어요. 젊은 친구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그런
시기가 오더라고요. 한때는 통장에 80원밖에 없었을 때도
있었고, 동생한테 부탁해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버틸 때도
있었는데 많은 돈이
생기면 기뻐야 하잖아요? 신세계로 꽤 많은
돈을 벌었을 때
지금 인터뷰하는 이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결국, 내가 이거였구나!’ 아마 이해
못 하실 거예요. 너무 우울했는데 함께한
스태프들한테 보너스를 많이
줬더니 마음이 조금
괜찮아지더라고요. 요즘 대표님의 가장
큰
고민은
뭔가요?
'어떻게
늙어야 할까?’를 고민해요. 후지게 살면 안
되는데 영화든, 삶이든 후지게
살다 죽을까 봐
두려워요. 지금은 처자식이 없어
할 말 다하고
비굴하지 않게 살
수 있는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하면 그럴 수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 제
나이가 마흔다섯인데 지금
자식을 낳아야 하나
그런 것도 고민이고요. 저는 항상 30대일 줄
알았는데 눈뜨고 나니
벌써 이 나이네요. 가끔 집에 가만히
있다가 까닭 없이
눈물도 나고 그래요. (웃음) 사람들은 다 나약한
거 같아요. 그런 걸
감추고 사는 거죠. 저희는 언제나 청춘의
정의를
듣고자
해요. PD님에게 청춘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이게 제일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그냥 실수가 용납되는
시기 같아요. 나이 들어
실수하면 잃을 게
너무 많아요. 저는 지금
돌이켜보면 혈기는 있었는데
용기는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사실 연애도
많이 못 해보고요. 하고 싶은 걸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며 살려고 하긴
했는데 조금 더
솔직하게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요. 대표님의 20대처럼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좌절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요. 이들에게 한 마디만
부탁해요.
어금니 꽉 깨물고
또 해야죠. 전 제일
불행한 사람이 재능은
없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뭔가를 이루어
오면 거기서 감동이
와요. 돈 많고, 백 많고
이런 친구들이 잘되는
건 당연한 거죠. 거기엔 감동이 없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이루어
내는 것 그게
감동이 크죠. 자기 재능이
뭐가 있는지 다양한
걸 해보며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를
끝까지 해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후회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멕시코
화가가 있는데 교통사고로
오른손이 절단됐어요. 그래서 좌절에
빠져 몇 년을
보냈죠.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안 쓰던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시를 했는데
예전에 오른손으로 그린
그림보다 훨씬 더
좋은 거예요. 그 작품
제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솔직히 다
핑계예요. 사람들은 남들 앞에선
이런저런 실패한 이유를
이야기해요. 그런데 혼자 방구석에
앉아 거울을 보고
있으면 왜 실패했는지
자기는 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핑계를
대고 싶은 거예요. 답은 자기 안에
다 있어요. 고통을 두려워만
하지 말고 들이대면
돼요. 물론 겁나죠. 저도 그랬으니깐. 하지만 저는 다시
청춘의 시기가 온다면
더 많이 들이대고
겁 없이 솔직해질
거 같아요. 제가 왜 이 인터뷰를 좋아하는지, 여러분도 공감이 되시나요? 저와 인터뷰를 진행한 김재진 대표, 최모레 포토그래퍼 셋이 한재덕 대표님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마주했던 그 순간이 잊히질 않아요. 세 명 모두 얼빠진 얼굴로 “와… 진짜다!” 했거든요. 대표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캔들을 보여주면서 ‘이건, 정재가 준 건데~’라고 하셨던 말과, ‘지금 두 분이 앉은 그 소파에 어제 민식이 형이 앉아 있다 갔는데~’라는 말, 또 벽에 걸려 있는 영화 포스터 하나와 바닥에 놓여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정민이가 오는 날엔 정민이 포스터로 미리 걸어 놓고, 민식이 형이 오는 날엔 민식이 형 포스터로 바꿔놔요’라고 하셨던 말씀. 아무렇지 않게 언급했던 그 ‘정재, 민식이 형, 정민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아는 그 배우들 이정재, 최민식, 황정민이라는 사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사실 이런 말보다 대표님을 정말 ‘진짜다!’라고 생각한 건, 돈이 많아 영화사를 차리고 운이 좋아 대박이 난 분이 아니라 1년에 200만 원 받고 제작부 막내로 시작해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올라와 지금의 자리까지 오셨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이분의 말씀 하나하나를 더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여담 하나만 하고 마치자면, 이렇게 대표님을 인터뷰하고 나서 컨셉진의 사정이 많이 어려워졌던 때가 있어요. 그때 대표님께서 회사 직원들과 논의하시고는 컨셉진의 인쇄비를 후원해주셨어요. 우리의 인연은 정말 인터뷰 한 번 한 것이 고작인데,,, 저희를 보시며 ‘창작자로서의 어려움’을 공감해주시고, 격하게 응원해주셨죠. 이런 분인데, 제가 어떻게 이분과 이 인터뷰를 잊겠어요. 그때 이후로, 자주는 못 하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 가끔 인사드리는데요. 저희 대표와 제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다짐한 게 하나 있어요. ‘우리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대표님이 제작하시는 영화 촬영장에 밥차, 안 되면 커피차라도 꼭 한번 보내자!’라고요. 이 다짐을 아직 지키지 못했는데, 머지않아 실현시켜 보려고 합니다.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를, 여러분도 응원해주세요! 이 레터를 작성하기 위해 오랜만에 ‘사나이픽처스’를 검색해보니, 저희와의 인터뷰 이후에 <무뢰한>, <아수라>, <공작> 등의 영화를 제작하고, 최근에는 이정재, 정우성 주연의 <헌트> 개봉까지 앞두고 있더라고요. 아, 한남동에 있던 사무실도 신당동으로 이전을 했는데, 사옥 카페 ‘브라운 래빗 사나이픽처스점’이 생겼더라고요. 블로그에서 살짝 보니 대표실에 있던 그 포스터들이 카페에 비치되어 있던데, 조만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여러분도 이 인터뷰를 읽고, 신당동으로 나들이 한번 떠나시는 거 어떠세요? 그럼 저는 오늘 여기서 마치고, 다음주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짝이는 주말, 저마다 만족하실 만한 주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편집장 김경희 드림 지난 뉴스레터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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